지금 한국이 '통미봉남' 욕할 수 있을까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 우크라는 뺀 미·러의 우크라 종전협상

입력 : 2025-02-20 오후 3:59:07
18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미국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협상 회담.(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애초 알아주는 친러파다. 2017년 시작한 트럼프 1기 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이용해 중국을 견제하고 중동 문제까지 해결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집권하자마자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했다는 '러시아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무산됐다. 나중에 그는 '워터게이트'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와 한 인터뷰에서 푸틴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대통령에 복귀한 트럼프는 지난 12일(현지시각) 푸틴과 통화하면서 종전 협상 시작에 합의했다. 취임 이후 푸틴과 한 첫 공식통화에서 바로 본론으로 직행한 것이다.
 
트럼프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존 랫클리프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을 협상 대표로 임명했다. 푸틴도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등을 협상 대표로 지정하면서 미국과 러시아 협상 대표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18일 첫 협상을 시작했다.
 
침략당한 우크라는 뺀  미·러 종전 협상…러 외무 '만족감'
 
협상의 최대 쟁점은 러시아 점령지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문제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러시아 편을 들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2014년 이전 수준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트럼프는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일축했다. 우크라의 나토 가입 문제도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첫 협상에서 미·러 양측은 △종전 방안을 다룰 고위급 협의체 구성 △양국 대사 신속 임명 △외교 공관 운영 정상화에 합의했다.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대러 제재 해제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제재는 전쟁의 결과물"이라며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모든 당사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정학·경제적 측면에서 "러시아와 협력할 수 있는 멋진(incredible) 기회"를 모색하기로 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첫 협상에서부터 이렇게 진도를 빼고 있는데, 적어도 현재까지는 협상장 현장에서부터 피해당사자인 우크라는 완전 배제됐다. 트럼프가 "우크라와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푸틴의 요구를 들어줬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일방적 침략으로 군인만 8만명 사망에 40만명이 부상하는 인명피해(지난해 말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를 입었고 그리스 면적에 맞먹는 영토 5분의 1(13만1000㎢)을 빼앗겼는데도 말이다.
 
이날 회담 후 러시아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회담 이후 "미국 측이 우리의 입장을 더 잘 이해했다"며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트럼프정부가 만든 우크라 '재건 투자기금' 협정 초안에서 미국은 그간 우크라에 대한 지원과 종전 후 군사지원 등에 대한 대가로 우크라의 항만, 인프라, 석유·가스 등 국가 자원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했다. 특히 우크라가 희토류 등 자원 채굴을 통해 번 돈의 50%를 달라고 했다. 트럼프는 직접 "우크라이나에 5000억달러(약 726조원) 가치의 희토류를 원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조선일보> 등 한국 내 친미파들마저도 미국을 '안보 조폭'이라고 비난하지만, 국제정치는 결국 강대국 정치라는 오래된 진실을 새삼 느낄 뿐이다.
 
우크라 상황을 보면서 한반도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라고 표현했고 "김정은과 다시 연락을 취해보겠느냐(reach out)"는 질문에 곧바로 "그렇게 할 것"(I will)이라고도 했다.
 
국가정보원은 트럼프가 김 위원장과 만나 핵 동결이나 군축 협상 등 스몰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만 그 가능성이 당장 눈앞 현실로 나타나기는 쉽지 않다. 2018년~2019년에 비해 김정은의 '몸값'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왔을 때 한국은 '젤렌스키 패싱'의 한반도 버전이라 할 '통미봉남'(通美封南)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국이 미·일 동맹에도 한·미 동맹에도 없는, '유사시 자동개입'을 명시한 동맹은 나토뿐이다. 트럼프는 그런 나토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트럼프가 그동안 윤석열정부는 뭐했냐고 묻는다면?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고 했다. 북한이 돌연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는데도 당시 74세였던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으로 송환했다. 그러나 1차 북핵 위기 속에서 '북한 붕괴-흡수통일론'으로 일관하면서 1994년 북·미 간 제네바 합의과정에서 완전 소외당했다. 그 뒤 뒷북을 치고 나섰으나 소리만 요란할 뿐 늦게온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네바 합의에 따른 함경남도 신포 경수로 건설비 46억 달러의 70%를 부담하게 됐다. '통미봉남'이 유행어가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또 한 번의 통미봉남이 노무현정부 초기인 2003년에 발생했다. 2차 북핵 위기가 악화하면서 노무현정부는 중국이 제안하고 북한과 미국이 동의한 북·미·중 3자회담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북한과 미국만이라도 실질적 대화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흑묘백묘(黑猫白猫)론'까지 꺼냈다. 그런데 그 3자회담이 결국은 남북과 미·일·중·러가 참여한 6자회담을 낳았다. 노무현정부는 야당의 비웃음 속에서도 계속 움직이면서 6자회담 틀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현재 상황은 어떤가. 윤석열정부는 임기 내내 북한과 완전 단절했다. 오히려 북한을 자극해 국지전을 유발하려 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그 책임이 오롯이 윤석열정부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부에서 북한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이를 완강하게 관철하고 있다. 대북전단에 발끈한 북한이 오물풍선 살포로 대응, 긴장이 높아지자 주한 미 대사가 전단 살포 자제를 촉구하기까지 했다.
 
트럼프가 대놓고 통미봉남에 나서면, 뭐라고 항변 한마디 할 수 있을까 싶다. 신포 경수로 사례처럼 뒷북은 그 대가가 크다. 그동안 당신들은 뭐했냐고 하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당신처럼 우리도 '힘에 의한 평화'가 구호였다고 할 것인가, 평양에 무인기 보냈다고 할 것인가.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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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방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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